Life of Pi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 영화’로 꼽을 수 있는 영화의 목록을 아마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굳이 목록으로 정리해 놓지는 않았더라도 ‘아, 그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손꼽을 만한 영화였지’ 하는 영화 10편쯤은 있을테고,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영화가 보이면 잠시 넋 놓고 보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또는 직업적으로 영화를 보느냐 등에 따라 목록의 길이가 다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한 그 목록은 계속 갱신될 겁니다. 그리고 ‘인생 영화’에는 “작품성”이 있고 “고상한” 영화들이 선정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한 영화 – 예를 들면 <Transformer> – 가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하면 왠지 지적이지 않고 깊이 없어 보일것 같고 가벼워 보일 것 같습니다. <Captain America: Winter Soldier>이나 <Spider-man 2>같은 영화는 어디에 내 놓아도 좋을 영화지만, 자랑 스럽게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껄끄럽습니다. 특히 요즘은 내가 영화를 보는 건지 만화를 보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디지털 피로’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화좀 본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한 영화보다 로케 촬영이나 세트 촬영이 정말 예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시각효과가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생 영화”의 목록에 올려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철학적이고 사유적이며 인문학적인 깊이를 더 해줄 영화가 있으니, 바로 <Life of Pi> 입니다.

<Life of Pi>는 2012년 영화입니다. 리안 감독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Sense and Sensibility>, 녹색 레고가 전투기에 매달려 있던 영화로 기억하는 <Hulk>를 감독했고, 주윤발 형님께서 칼을 드셨고 양자경 누님께서 날아다니시던 <와호장룡>으로 아카테미 4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며 세계적인 감독이 됩니다. 그리고 난리가 났었던 영화, <Brokeback Mountain>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양조위와 탕웨이가 나왔던, 탕웨이의 겨드랑이 털이 화제가 되었던 <색, 계>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화면이 스토리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탕웨이의 겨드랑이 털을 숨죽이고 보았던 영화 <색, 계>에서 섹스씬이 없다고 가정해 보면, 영화는 단순한 치정극 또는 시대물이 될 겁니다. 리안 감독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다른 점은 거기에 있습니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충격적이기 까지 한 그 장면들은 단순히 시대와 주인공들의 감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장면들은 주인공 그 자체로 느껴지고, 그 장면들은 스토리 그 자체가 됩니다. 보통 그런 장면들은 삭제를 해도 영화의 진행에 별 다른 문제가 없어지지만, 리안의 영화에서는 그 장면들이 바로 스토리여서, 케이블에서 틀어주는 <색, 계>와 DVD로 보는 <색, 계>는 때로는 전혀 다른 영화로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장면들에서 대사로는 설명하기 힘든 탕웨이와 양조위를 알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리안 감독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줌과 비슷한 발음의 “피신”이라는 이름 대신 “파이”라는 이름을 쓰는 주인공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난을 타개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동물원을 미국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사랑에 갓 눈을 뜬 파이는 여자친구를 뒤로 한 채 가족, 동물들과 함계 배를 타고 미국 이민길에 오르게 되고 배는 태풍을 만나 침몰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는 운 좋게도 구명 보트에 올라 목숨을 건집니다. 구명 보트에 혼자 올랐다면 캐스트 어웨이가 되었겠지만, 구명 보트에는 오랑우탄, 다리 부러진 얼룩말, 하이에나,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사자가 오릅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과 얼룩말을 죽이고 사자는 하이에나를 죽입니다. 파이는 사자 리처드 파커와 둘이 남아 몇 백일을 구명선에서 표류합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함께 점프하는 고래를 보고, 날치떼를 보고, 참치를 잡아 나눠먹고, 식인섬에 오르기도 합니다. 표류가 계속되고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를 때쯤 배는 멕시코 연안에 닿게 되고 육지에 오른 리처드 파커는 무심한 듯 파이 곁을 떠나 정글로 가버립니다. 구조된 파이는 병원에서 보험회사 직원을 만나 표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보험회사 직원은 배에 같이 탄 것이 원숭이, 하이에나, 사자가 아니고 요리사, 요리 보조, 그리고 파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냐고 묻습니다. 증거로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면서.

게리 마셜 감독의 1990년작 <Pretty Woman>에서 주인공인 비비안은, 에드워드에게 어릴 때 부모로 부터 학대를 받아, 다락에 갇히는 적이 많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락에 갇혀서는 자기는 높은 탑에 갇힌 공주라고, 백마탄 왕자님이 구해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공주라고 상상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보면 <Life of Pi>의 파이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인공 파이는 동물원의 동물들과 미국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태풍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잃습니다. 손바닥 만한 구명 보트에서 몇 백일을 표류하다가 멕시코 연안까지 표류하여 결국 구조됩니다. <Pretty Woman>은 신데렐라 이야기니까 비비안의 어릴적 상상이 현실이 되며 백마와 검 대신 리무진과 신용카드로 무장한 왕자님이 빈민가에서 비비안을 구출하며 끝을 맺지만, <Life of Pi>의 이야기는 집 다락방에 갇힌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자가 손바닥만한 구명선 위에서 몇 백일을 표류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가 상상속의 이야기인지 실제 이야기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며, 종국에는 중요하지 조차 않게 됩니다.

영화는 처음으로 돌아가, 기자에게 자신의 표류 이야기를 전하던 파이가 묻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으냐고. 사자와 사람이 몇 백일간 구명선에서 표류하며 고래를 만나고 날치떼를 만나고 식인섬에 상륙한 이야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구명선에 몇 명의 사람이 남아 서로를 죽이고 시체를 먹은 이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표류했다가 서로 죽인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자 이야기를 믿고 싶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고, 믿고 싶은 것만 믿다보면 결국에는 어떤게 사실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믿고 싶은 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가면 어떤 것이 사실인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영화의 해석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이야기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 정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됩니다. 이 영화를 수십번 보다보면 볼때마다 다른 해석들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이 영화를 해석 하는 것이 무의미 해지게 되며, 영화의 관객 조차 리처드 파커와 파이의 이야기를 따라 두 이야기의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니, 결론에 이르는 것 조차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닿게 됩니다.

이 영화의 영상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의 관객이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압도적인 영상입니다. 이 영화는 시각효과가 어떻게 영화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압도적인 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블 영화도 좋고 괴수 영화도 좋고 로봇 영화도 좋습니다. 그래픽으로 떡칠을 하건 말건 좋은 영화는 그 영화대로의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Junglebook>을 실사 영화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Life of Pi>의 영상은 볼거리가 아니고 스토리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영화를 또 보고 싶습니다.

사족) 넷플릭스로 이 영화를 보던 중 큰 스크린에서 3D로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영화의 3D에 대해 제임스 카메론이 극찬 인터뷰를 자청했다는 말들 들으니 참을 수가 없더군요. 마침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3D를 지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셔텨 글래스와 3D 블루레이를 구입하여 다시 시청했습니다. 고래 점프 씬의 3D를 정말 기대했는데 기대만큼 미치지 못하더군요. 아바타 2 개봉 즈음에 3D revisited 같은 행사한번 해서 재 상영 기회가 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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