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m Bodies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유난히도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옛 것을 가져와서 ‘요즘 것’으로 훌륭히 재장초 해내는 감독들, 예를 들면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작가들도 있지만, 요즘 헐리우드 스튜디오는 아무것이나 다 고치고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스탠리 큐브릭 처럼 찍어내는 작품마다 걸작인 위대한 감독이거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뛰어난 장인이거나, 스필버그 같은 장악력과 연출력과 뚝심을 가진 감독과 작가는 흔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의 개수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한계가 있고, 요즘은 갖은 예전 것들을 가져와서 다시 만들려고 난리를 냅니다. 여기에 ‘옛 것이지만 새로워야 한다’는 공식이 붙습니다. 작가들은 공식에 충실하게 각색을 시도합니다. 모든 작가가 쿠엔틴 타란티노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헐리우드에 차고 넘치는 감독과 작가들 중 그럼 역량을 가진 작가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쉽게 ‘새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하는 방법은 클리셰 비틀기 입니다. Bourne 시리즈는 007영화의 클리셰를 훌륭하게 비틀어 성공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브리오니 수트를 입고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싸우며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스파이’가 007이 만들어낸 캐릭터 클리셰라면, Bourne 시리즈는 ‘박터지게 죽을 것 같이 싸우며 외로운’ 새로운 스파이의 전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중에는 007이 Bourne을 따라하기도 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모든 결과물이 항상 이럴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기억하실 겁니다. 뱀파이어가 나오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입니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원래 햇빛을 보면 타 죽고, 마늘을 무서워하며, 거울에 비치지 않고, 십자가에 떠는 종족입니다. 또한 이쁘며 잘생기고 물리적 괴력을 가지며 영생의 축복을 받은 가상의 생명체입니다. 뱀파이어 영화의 클리셰는 톰 홀랜드 감독의 1985년 작 <Fright Night>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늑대인간과 동거하는 뱀파이어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여자를 유혹하고, 뱀파이어가 여자의 목덜미를 물 때는 성적인 긴장감이 흘러넘치며, 성수와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마지막에는 햇빛에 타 죽는 악당입니다. 이 클리셰를 훌륭히 비튼 영화는 닐 조던 감독의 1994년 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입니다. 고독에 못 이겨 뱀파이어가 되었지만, 사람의 피를 빨아먹기 싫어해 쥐 피를 빨아먹으며 살고, 어린나이에 뱀파이어가 된 아이는 여성으로 성장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주인공인 그에게 사랑과 존경과 열등감을 가진(츤데레?) 뱀파이어가 등장하여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영생, 늙지 않음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이런 클리셰를 아예 무시했습니다.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이쁘며 잘생기고 물리적 괴력을 가지며 영생의 축복을 받은 생명체인데, 뱀파이어가 전통적으로 가지는 약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흡혈에 대해 딱히 ‘목마름’을 느끼지도 않고, 창백하며 아름다운 외모에, 부자, 심지어는 햇빛을 받으면 피부가 다이어몬드같이 빛이 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특별한 이유없이 예의(싸가지!) 없는 여주인공에 목을 매고, 별 이유없이 사랑과 충성을 맹세합니다. 뱀파이어 종족과 동일한 종류의 매력을 가진 늑대인간 역시 주인공 벨라에게 충성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여성들은 송중기의 늑대인간을 볼 때와 같았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늙었지만 아직도 예뻐요. 그리고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송중기의 얼굴을 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는 관객들은 ‘내가 버렸지만 아직도 나만 사랑하는 멋있는 첫사랑’의 판타지가 실현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트와일라잇의 작가와 감독 모두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뱀파이어는 착취 계층이 느끼는 지배 계층에 대한 이미지가 상징화 된 것이었습니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귀족 계층이었고, 귀족은 평민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사악한 귀족들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평민은 착취의 역사속에서 살아왔으며, 이는 현대에 이르러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이야기와 현실에서 귀족이나 자본가는 평민과 노동자의 피를 빨아 먹으며 살아왔으며, 때로는 평민과 노동자가 귀족과 자본가를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뱀파이어 영화에서 주인공 연인의 목덜미를 깨물어 피를 빠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주인공의 연인은 뱀파이어에게 왜인지 모르게 끌리며, 결국은 유혹에 넘어가지만 주인공 연인에 의해 구조됩니다. 이는 자기 여자 또는 재산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귀족 또는 자본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결국에는 이기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입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이런 평민 또는 노동자가 느끼는 불안감의 상징이던 뱀파이어를 서점 연애 코너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하이틴 로맨스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브람스토커에서 시작되어 몇백년의 역사를 가진 뱀파이어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계 종족으로 둔갑시켜, 여학생 또는 로맨스를 꿈꾸는 아줌마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폭풍간지의 연애종족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난데없는 비틀기가 싫습니다.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타 죽어야 하고, 누군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야 하고, 거울에 비치지 않아야 하며, 관속에 누워 불편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잠을 자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뱀파이어 헌터에게 말뚝으로 심장을 관통당해 죽어야 합니다(뱀파이어가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뱀파이어는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인간을 먹이감으로 보아야 하고, 인간은 거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뱀파이어의 약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007은 007 답게 적진에 잠입해서도 당당히 ‘본드, 제임스 본드’하고 본명을 말해야 하고, 어젯밤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에게 주저없이 총을 쏠 수 있어야 합니다.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다워야 하고, 007은 007 다워야 하며, 좀비는 좀비 다워야 하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예의입니다.

Warm Bodies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대세에 따라 좀비의 클리셰를 심하다 못해 과하게 비틀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생각(!)을 합니다. 좀비끼리 대화(!)도 합니다. 식사 대상인 남자의 뇌를 먹더니 기억을 공유하게 되어 남자의 여자친구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는 심장이 뛰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착한 좀비와 나쁜 좀비로 나뉘는데, 착한 좀비 팀이 인간과 한편이 되어 나쁜 좀비를 무찌르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게 뭡니까. 인간 여자가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 뱀파이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지다니요.

좀비는 좀비 다워야 합니다. 좀비는 생각따위 하면 안되고, 우우우… 하며 생각 없이 떼로 몰려 다녀야 하며, 불꽃놀이가 시작하면 만사를 다 제치고 그것만 보고 있어야 하고, 좀비의 힘은 막대한 머릿수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절대로 뛰거나 날거나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조지 로메로 영화에 나오는 좀비만 진정한 좀비로 인정합니다. 새벽의 저주에 나오는 좀비는 올림픽 육상 종목에 나가도 될 것 같아 보였고, 월드워 Z의 좀비는 물린 후 12초만에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됩니다. 이것은 좀비가 아닙니다. 좀비는 좀비 답게 때로 몰려서 우우우.. 몰려 다니다가 식사감을 만나면 떼로 달려들어 가차없이 사지를 분해하고 창자를 뜯어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좀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장면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홀트가 분한 주인공 좀비 R은 테레사 팔머가 분한 여 주인공 줄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은신처인 비행기로 데리고 옵니다.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에 앉아 떨고 있는 줄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R은 LP(!)를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들려줍니다.

Guns and Roses의 Patience.

이 음악을 들으며 줄리를 바라보던 R은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낍니다. 액슬 로즈의 휘파람으로 시작하여 이지와 슬래쉬의 기타가 울려퍼지고, 액슬의 낮은 저음으로 사랑의 상처를 읖조리는 이 음악으로, 좀비 R의 공개되지 않은 과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줄리가 좀비인 R을 사랑할 수도 있겠다고 공감하게 되며, 심지어는 좀비의 심장이 뛰는 것 까지 이해가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후로 영화는 ‘클리셰를 비트는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라가며, 어이없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Patience가 정말 ‘울려퍼지는’ 한 장면으로 영화에 사운드트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줍니다. 다만, 그 한 장면 만으로 영화의 모든 것이 용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옛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만들어 성공한 영화들에는 삶에 대한 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사족)
루벤 플리셔 감독의 2009년 작 <좀비랜드>에서의 좀비는 뛰어다니긴 하지만 꽤 마음에 들더군요. 이 영화에는 무려 Metallica의 For Whom the Bell Tools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Guns and Roses의 음악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영화의 호불호가 심하게 갈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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