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Pi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 영화’로 꼽을 수 있는 영화의 목록을 아마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굳이 목록으로 정리해 놓지는 않았더라도 ‘아, 그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손꼽을 만한 영화였지’ 하는 영화 10편쯤은 있을테고,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영화가 보이면 잠시 넋 놓고 보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또는 직업적으로 영화를 보느냐 등에 따라 목록의 길이가 다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한 그 목록은 계속 갱신될 겁니다. 그리고 ‘인생 영화’에는 “작품성”이 있고 “고상한” 영화들이 선정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한 영화 – 예를 들면 <Transformer> – 가 내 인생의 영화라고 하면 왠지 지적이지 않고 깊이 없어 보일것 같고 가벼워 보일 것 같습니다. <Captain America: Winter Soldier>이나 <Spider-man 2>같은 영화는 어디에 내 놓아도 좋을 영화지만, 자랑 스럽게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껄끄럽습니다. 특히 요즘은 내가 영화를 보는 건지 만화를 보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디지털 피로’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영화좀 본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한 영화보다 로케 촬영이나 세트 촬영이 정말 예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시각효과가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인생 영화”의 목록에 올려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철학적이고 사유적이며 인문학적인 깊이를 더 해줄 영화가 있으니, 바로 <Life of Pi> 입니다.

<Life of Pi>는 2012년 영화입니다. 리안 감독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Sense and Sensibility>, 녹색 레고가 전투기에 매달려 있던 영화로 기억하는 <Hulk>를 감독했고, 주윤발 형님께서 칼을 드셨고 양자경 누님께서 날아다니시던 <와호장룡>으로 아카테미 4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며 세계적인 감독이 됩니다. 그리고 난리가 났었던 영화, <Brokeback Mountain>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양조위와 탕웨이가 나왔던, 탕웨이의 겨드랑이 털이 화제가 되었던 <색, 계>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화면이 스토리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탕웨이의 겨드랑이 털을 숨죽이고 보았던 영화 <색, 계>에서 섹스씬이 없다고 가정해 보면, 영화는 단순한 치정극 또는 시대물이 될 겁니다. 리안 감독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다른 점은 거기에 있습니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충격적이기 까지 한 그 장면들은 단순히 시대와 주인공들의 감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장면들은 주인공 그 자체로 느껴지고, 그 장면들은 스토리 그 자체가 됩니다. 보통 그런 장면들은 삭제를 해도 영화의 진행에 별 다른 문제가 없어지지만, 리안의 영화에서는 그 장면들이 바로 스토리여서, 케이블에서 틀어주는 <색, 계>와 DVD로 보는 <색, 계>는 때로는 전혀 다른 영화로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장면들에서 대사로는 설명하기 힘든 탕웨이와 양조위를 알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리안 감독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줌과 비슷한 발음의 “피신”이라는 이름 대신 “파이”라는 이름을 쓰는 주인공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난을 타개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동물원을 미국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사랑에 갓 눈을 뜬 파이는 여자친구를 뒤로 한 채 가족, 동물들과 함계 배를 타고 미국 이민길에 오르게 되고 배는 태풍을 만나 침몰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는 운 좋게도 구명 보트에 올라 목숨을 건집니다. 구명 보트에 혼자 올랐다면 캐스트 어웨이가 되었겠지만, 구명 보트에는 오랑우탄, 다리 부러진 얼룩말, 하이에나,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사자가 오릅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과 얼룩말을 죽이고 사자는 하이에나를 죽입니다. 파이는 사자 리처드 파커와 둘이 남아 몇 백일을 구명선에서 표류합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와 함께 점프하는 고래를 보고, 날치떼를 보고, 참치를 잡아 나눠먹고, 식인섬에 오르기도 합니다. 표류가 계속되고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를 때쯤 배는 멕시코 연안에 닿게 되고 육지에 오른 리처드 파커는 무심한 듯 파이 곁을 떠나 정글로 가버립니다. 구조된 파이는 병원에서 보험회사 직원을 만나 표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보험회사 직원은 배에 같이 탄 것이 원숭이, 하이에나, 사자가 아니고 요리사, 요리 보조, 그리고 파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냐고 묻습니다. 증거로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면서.

게리 마셜 감독의 1990년작 <Pretty Woman>에서 주인공인 비비안은, 에드워드에게 어릴 때 부모로 부터 학대를 받아, 다락에 갇히는 적이 많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락에 갇혀서는 자기는 높은 탑에 갇힌 공주라고, 백마탄 왕자님이 구해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공주라고 상상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보면 <Life of Pi>의 파이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인공 파이는 동물원의 동물들과 미국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태풍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잃습니다. 손바닥 만한 구명 보트에서 몇 백일을 표류하다가 멕시코 연안까지 표류하여 결국 구조됩니다. <Pretty Woman>은 신데렐라 이야기니까 비비안의 어릴적 상상이 현실이 되며 백마와 검 대신 리무진과 신용카드로 무장한 왕자님이 빈민가에서 비비안을 구출하며 끝을 맺지만, <Life of Pi>의 이야기는 집 다락방에 갇힌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자가 손바닥만한 구명선 위에서 몇 백일을 표류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가 상상속의 이야기인지 실제 이야기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며, 종국에는 중요하지 조차 않게 됩니다.

영화는 처음으로 돌아가, 기자에게 자신의 표류 이야기를 전하던 파이가 묻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으냐고. 사자와 사람이 몇 백일간 구명선에서 표류하며 고래를 만나고 날치떼를 만나고 식인섬에 상륙한 이야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구명선에 몇 명의 사람이 남아 서로를 죽이고 시체를 먹은 이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표류했다가 서로 죽인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자 이야기를 믿고 싶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고, 믿고 싶은 것만 믿다보면 결국에는 어떤게 사실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믿고 싶은 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가면 어떤 것이 사실인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영화의 해석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이야기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 정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됩니다. 이 영화를 수십번 보다보면 볼때마다 다른 해석들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이 영화를 해석 하는 것이 무의미 해지게 되며, 영화의 관객 조차 리처드 파커와 파이의 이야기를 따라 두 이야기의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니, 결론에 이르는 것 조차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닿게 됩니다.

이 영화의 영상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의 관객이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압도적인 영상입니다. 이 영화는 시각효과가 어떻게 영화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압도적인 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블 영화도 좋고 괴수 영화도 좋고 로봇 영화도 좋습니다. 그래픽으로 떡칠을 하건 말건 좋은 영화는 그 영화대로의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Junglebook>을 실사 영화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Life of Pi>의 영상은 볼거리가 아니고 스토리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영화를 또 보고 싶습니다.

사족) 넷플릭스로 이 영화를 보던 중 큰 스크린에서 3D로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영화의 3D에 대해 제임스 카메론이 극찬 인터뷰를 자청했다는 말들 들으니 참을 수가 없더군요. 마침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3D를 지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셔텨 글래스와 3D 블루레이를 구입하여 다시 시청했습니다. 고래 점프 씬의 3D를 정말 기대했는데 기대만큼 미치지 못하더군요. 아바타 2 개봉 즈음에 3D revisited 같은 행사한번 해서 재 상영 기회가 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Passengers

잡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100문 100답 설문조사에는 ‘만약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면?’ 이라는 항목이 가끔 등장합니다. 고독을 즐기는 외로운 늑대이거나 또는 심각한 중2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면 ‘어이쿠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일이 어디 있겠는가’ 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 나온 가장 많은 답은 ‘처음에 이것 저것 해 보다가 결국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죽겠지’ 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같은 좋은 말들이 많지만, 그 사회적이라는 것의 함의가 예전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게임이 등장하고 덕후니 히키코모리니 하는 단어들에 익숙해지면서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줄어들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되어’ 인간은 결국은 혼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들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십 몇년 전의 에반게리온 광풍 역시 이런 비슷한 이유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기저에는 중2병(!)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광활한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멋진 글을 써 봐야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내 글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관심 가져줄 사람이 아예 없는 경우라는 거지요. 몇몇 사이트의 하드 유저들에게는 자다가 벌떡 일어날 무서운 소리가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하여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가 되어 실제 세계에서 만나지 않고 컴퓨터 또는 스마트 폰으로만 대화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만, 온라인으로 대화를 하건 게시판에 댓글을 달건 좋아요 버튼을 누르건 간에 사람은 어떤 형태로는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전쟁이나 외계인 침공, 또는 좀비 사태로 인류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전등은 잘 켜지고 수돗물도 잘 나오며, 심지어 인터넷까지 되고 먹을 것도 많은데 오직 사람만 없는 겁니다. 운전도 할 수 있고 주유소에서 주유도 할 수 있고 놀이공원에도 갈 수 있으며 영화도 볼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건 이전과 같은데, 오직 하나 다른건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평생 먹을 것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굶어죽기는 커녕 평소 먹고싶었던 것을 마음것 먹을 수 있는 상황인 경우입니다.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처음엔 꽤 신날겁니다. 못해본 것, 하고 싶었던 것들 실컷 해 볼 수 있으니까요.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지는 못하겠지만,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해보았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서울 정도에 살고 있었다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 몇 개월에서 길면 몇 년간은. 그러다 점점 지치게 될 겁니다. 혼자서 뭔가를 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2~3년 지났다면 영화도 볼 만큼 보았을테고 먹고 싶은 것도 먹을 만큼 먹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일 겁니다. 남자일 경우라면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그립겠죠. 그러다가 정말로 아름다운 여성과 단 둘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면? 패신저스는 이 상황이 거대한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주인공 짐 프레스턴은 동면중인 상태로 우주 식민지 개척회사 홈스테드 컴퍼니의 초호화 우주 여객선 홈스테드 2 를 타고 5000명의 승객과 258명의 승무원과 함께 벅티 은하계의 네번째 행성인 홈스테드 2 행성을 향해 30년째 빛의 절반의 속도로 우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정비공이 직업인 짐은 90년을 더 날아 홈스테드 2에 도착해 새로운 친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예정입니다.

우주항해 중 운석과 충돌하여 몇 가지 사소한 고장이 발생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사소한 고장에 짐 프레스턴의 동면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입니다. 고장으로 인해 혼자 동면에서 깨게 되고, 다시 동면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나 여분의 동면 장치는 없습니다. 짐은 홈스테드 2 행성에 도착할 때까지 90년간 혼자 살다가 쓸쓸이 늙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처음에 짐은 호화 우주선의 갖가지 럭셔리한 편의시설들을 혼자 즐기지만, 곧 외로워집니다. 자살을 시도하던 날 짐은 오로라의 존재를 알게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딱 봐도 최첨단 호화 우주선인 홈스테드 2호가 우주를 날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누가봐도  명백히 SF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짐이 동면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부터 그 어떤 장르라도 될 수 있습니다. 짐이 싸이코가 되어 동면중인 사람을 하나씩 죽이는 싸이코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홈스테드 2의 동면포드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사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었더라.. 등의 심령학적 문제가 발견되는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SF 공포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짐 혼자서 90년을 생존하는 캐스트 어웨이 같은 휴먼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갖은 난관을 해치고 홈스테드 2 행성에 가까스로 도달하는 어드벤처가 될 수도 있으며, 고장난 우주선이 폭발하기전 승객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히어로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존재와 실존에 관한 이야기부터, 영혼이 없는 존재인 안드로이드 로봇과 인간이 유대관계가 가능하느냐는 SF 철학 영화가 될 수도 있고 미지의 존재를 만나는 클로즈 인카운터나 얼라이브 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SF 어드벤처와 SF 로맨스를 엮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합니다. 짐은 오로라와 사랑에 빠지고, 들통난 비밀로 인해 난관에 봉착하고 나아가 더 큰 난관에 봉착하지만 천성이 착한 짐의 희생으로 모든 난관이 해결되고, 오로라와 5000명 승객의 목숨을 구한 짐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며 오로라의 사랑을 다시 쟁취합니다. 그리고 90년 후 홈스테드 2 행성에 도착할 때 까지 짐과 오로라는 호화 럭셔리 우주선에서 나무 키우며 잘먹고 잘 살았더라는 전형적인 SF 로맨스 영화로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모튼 틸덤의 전작은 베네틱트 컴버배치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이미테이션 게임>입니다. 두 영화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무대는 2차 대전입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앨런 튜링이 여성 수학자 조안의 도움을 받아 암호 해석 기계를 발명하는 이 영화는  앨런과 조안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큰 축이 됩니다. 동성애자 였던 튜링과 조안의 사랑이 이루어질리는 없지만, 튜링이 조안을 선택하고 이끌어 가는 과정과 중간 중간에 생기는 둘 간의 갈등, 튜링을 끝까지 돕는 조안등 둘 사이의 관계는 이 영화의 두 남녀의 관계와 미묘하게 오버랩 됩니다. 큰 사건간에서 진행되는 남녀간의 스토리를 훌륭히 엮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갓 스타가 되던 시점의 크리스 프렛과 이미 아카데미를 수상한 적 있는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나무랄데 없이 괜찮으며,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엄격한 멘토였던 로렌스 피시번은 딱 맞는 역할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트집을 잡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왜 아서는 도착 90년 전에 동작하고 있었는지?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지나가게 되는 악튜러스 항성에서의 슬링샷에 대해 왜 안내방송을 하는지? 등등 SF 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을 만큼 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허점들이 영화의 몰입에 방해될 정도는 아닙니다. 악튜러스 항성에서의 슬링샷 장면은 왜 안내방송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영상미를 보여주며, 그 큰 우주선에 당직 사관이 없다는 점이나 예비 동면 장치가 없다는 점은 영화의 스토리를 위한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갈 만 합니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표류해서 도착한 섬이 아무도 없는 하와이 였고, 1년 후 앤 해서웨이나 제니퍼 애니스톤이 같은 섬에 표류해와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탈출기회가 있었음에도 둘이서만 섬에서 영원히 살기로 맹세하며 영화가 끝맺는다면? <패신저스>가 될 것입니다. 

사족) 이 영화는 키아누 리브스와 레이첼 맥아담스를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두 배우를 기용했다면 SF 버전의 <Lake House>가 되었을 것 같군요.

Warm Bodies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는 유난히도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옛 것을 가져와서 ‘요즘 것’으로 훌륭히 재장초 해내는 감독들, 예를 들면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작가들도 있지만, 요즘 헐리우드 스튜디오는 아무것이나 다 고치고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스탠리 큐브릭 처럼 찍어내는 작품마다 걸작인 위대한 감독이거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뛰어난 장인이거나, 스필버그 같은 장악력과 연출력과 뚝심을 가진 감독과 작가는 흔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의 개수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한계가 있고, 요즘은 갖은 예전 것들을 가져와서 다시 만들려고 난리를 냅니다. 여기에 ‘옛 것이지만 새로워야 한다’는 공식이 붙습니다. 작가들은 공식에 충실하게 각색을 시도합니다. 모든 작가가 쿠엔틴 타란티노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헐리우드에 차고 넘치는 감독과 작가들 중 그럼 역량을 가진 작가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쉽게 ‘새것으로 보일 수 있도록’하는 방법은 클리셰 비틀기 입니다. Bourne 시리즈는 007영화의 클리셰를 훌륭하게 비틀어 성공한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브리오니 수트를 입고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싸우며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스파이’가 007이 만들어낸 캐릭터 클리셰라면, Bourne 시리즈는 ‘박터지게 죽을 것 같이 싸우며 외로운’ 새로운 스파이의 전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중에는 007이 Bourne을 따라하기도 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모든 결과물이 항상 이럴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기억하실 겁니다. 뱀파이어가 나오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입니다.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원래 햇빛을 보면 타 죽고, 마늘을 무서워하며, 거울에 비치지 않고, 십자가에 떠는 종족입니다. 또한 이쁘며 잘생기고 물리적 괴력을 가지며 영생의 축복을 받은 가상의 생명체입니다. 뱀파이어 영화의 클리셰는 톰 홀랜드 감독의 1985년 작 <Fright Night>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늑대인간과 동거하는 뱀파이어는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여자를 유혹하고, 뱀파이어가 여자의 목덜미를 물 때는 성적인 긴장감이 흘러넘치며, 성수와 십자가를 무서워하고 마지막에는 햇빛에 타 죽는 악당입니다. 이 클리셰를 훌륭히 비튼 영화는 닐 조던 감독의 1994년 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입니다. 고독에 못 이겨 뱀파이어가 되었지만, 사람의 피를 빨아먹기 싫어해 쥐 피를 빨아먹으며 살고, 어린나이에 뱀파이어가 된 아이는 여성으로 성장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주인공인 그에게 사랑과 존경과 열등감을 가진(츤데레?) 뱀파이어가 등장하여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영생, 늙지 않음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이런 클리셰를 아예 무시했습니다.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이쁘며 잘생기고 물리적 괴력을 가지며 영생의 축복을 받은 생명체인데, 뱀파이어가 전통적으로 가지는 약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흡혈에 대해 딱히 ‘목마름’을 느끼지도 않고, 창백하며 아름다운 외모에, 부자, 심지어는 햇빛을 받으면 피부가 다이어몬드같이 빛이 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특별한 이유없이 예의(싸가지!) 없는 여주인공에 목을 매고, 별 이유없이 사랑과 충성을 맹세합니다. 뱀파이어 종족과 동일한 종류의 매력을 가진 늑대인간 역시 주인공 벨라에게 충성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 여성들은 송중기의 늑대인간을 볼 때와 같았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늙었지만 아직도 예뻐요. 그리고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송중기의 얼굴을 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는 관객들은 ‘내가 버렸지만 아직도 나만 사랑하는 멋있는 첫사랑’의 판타지가 실현되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트와일라잇의 작가와 감독 모두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뱀파이어는 착취 계층이 느끼는 지배 계층에 대한 이미지가 상징화 된 것이었습니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귀족 계층이었고, 귀족은 평민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사악한 귀족들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평민은 착취의 역사속에서 살아왔으며, 이는 현대에 이르러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이야기와 현실에서 귀족이나 자본가는 평민과 노동자의 피를 빨아 먹으며 살아왔으며, 때로는 평민과 노동자가 귀족과 자본가를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뱀파이어 영화에서 주인공 연인의 목덜미를 깨물어 피를 빠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주인공의 연인은 뱀파이어에게 왜인지 모르게 끌리며, 결국은 유혹에 넘어가지만 주인공 연인에 의해 구조됩니다. 이는 자기 여자 또는 재산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귀족 또는 자본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결국에는 이기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입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이런 평민 또는 노동자가 느끼는 불안감의 상징이던 뱀파이어를 서점 연애 코너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하이틴 로맨스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브람스토커에서 시작되어 몇백년의 역사를 가진 뱀파이어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계 종족으로 둔갑시켜, 여학생 또는 로맨스를 꿈꾸는 아줌마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폭풍간지의 연애종족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난데없는 비틀기가 싫습니다.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타 죽어야 하고, 누군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야 하고, 거울에 비치지 않아야 하며, 관속에 누워 불편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잠을 자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뱀파이어 헌터에게 말뚝으로 심장을 관통당해 죽어야 합니다(뱀파이어가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뱀파이어는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인간을 먹이감으로 보아야 하고, 인간은 거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뱀파이어의 약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007은 007 답게 적진에 잠입해서도 당당히 ‘본드, 제임스 본드’하고 본명을 말해야 하고, 어젯밤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에게 주저없이 총을 쏠 수 있어야 합니다.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다워야 하고, 007은 007 다워야 하며, 좀비는 좀비 다워야 하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예의입니다.

Warm Bodies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역시 대세에 따라 좀비의 클리셰를 심하다 못해 과하게 비틀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생각(!)을 합니다. 좀비끼리 대화(!)도 합니다. 식사 대상인 남자의 뇌를 먹더니 기억을 공유하게 되어 남자의 여자친구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는 심장이 뛰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착한 좀비와 나쁜 좀비로 나뉘는데, 착한 좀비 팀이 인간과 한편이 되어 나쁜 좀비를 무찌르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게 뭡니까. 인간 여자가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 뱀파이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지다니요.

좀비는 좀비 다워야 합니다. 좀비는 생각따위 하면 안되고, 우우우… 하며 생각 없이 떼로 몰려 다녀야 하며, 불꽃놀이가 시작하면 만사를 다 제치고 그것만 보고 있어야 하고, 좀비의 힘은 막대한 머릿수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절대로 뛰거나 날거나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조지 로메로 영화에 나오는 좀비만 진정한 좀비로 인정합니다. 새벽의 저주에 나오는 좀비는 올림픽 육상 종목에 나가도 될 것 같아 보였고, 월드워 Z의 좀비는 물린 후 12초만에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됩니다. 이것은 좀비가 아닙니다. 좀비는 좀비 답게 때로 몰려서 우우우.. 몰려 다니다가 식사감을 만나면 떼로 달려들어 가차없이 사지를 분해하고 창자를 뜯어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좀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장면 때문입니다. 니콜라스 홀트가 분한 주인공 좀비 R은 테레사 팔머가 분한 여 주인공 줄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은신처인 비행기로 데리고 옵니다.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에 앉아 떨고 있는 줄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R은 LP(!)를 꺼내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들려줍니다.

Guns and Roses의 Patience.

이 음악을 들으며 줄리를 바라보던 R은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낍니다. 액슬 로즈의 휘파람으로 시작하여 이지와 슬래쉬의 기타가 울려퍼지고, 액슬의 낮은 저음으로 사랑의 상처를 읖조리는 이 음악으로, 좀비 R의 공개되지 않은 과거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줄리가 좀비인 R을 사랑할 수도 있겠다고 공감하게 되며, 심지어는 좀비의 심장이 뛰는 것 까지 이해가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후로 영화는 ‘클리셰를 비트는 영화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라가며, 어이없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Patience가 정말 ‘울려퍼지는’ 한 장면으로 영화에 사운드트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줍니다. 다만, 그 한 장면 만으로 영화의 모든 것이 용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옛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만들어 성공한 영화들에는 삶에 대한 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사족)
루벤 플리셔 감독의 2009년 작 <좀비랜드>에서의 좀비는 뛰어다니긴 하지만 꽤 마음에 들더군요. 이 영화에는 무려 Metallica의 For Whom the Bell Tools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Guns and Roses의 음악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영화의 호불호가 심하게 갈라질 수 있습니다.

Begin Again

음악 영화는 뮤지컬과 음악이 주제인 영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얼마전 개봉한 레미제라블이 전자라면, Begin Again은 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Begin Again의 감독인 존 카니의 전작인 <Once>역시 후자인 경우입니다. 잭 블랙 주연의 <School of Rock>도 후자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죠. School of Rock DVD의 코멘터리를 보면, 잭 블랙이 나와서 영화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잭 블랙이 ‘이 영화는 뮤지컬 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다가 ‘아니죠… 이 영화는 뮤지컬은 아닙니다. 뮤지컬은 난데없이 노래를 부르잖아요. 배우가 나와서 갑자기 밥 먹었니~~~ 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되게 웃긴 장면이었죠.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Once와는 달리 전형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를 10분 정도 보면 영화가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독한 두 남녀와 그들의 음악을 더블린의 더부룩한 분위기에 잘 녹여냈던 유니크한 영화였던 전작과는 달리, 특별하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상처받은 젊은 여성 음악가와 나락에 빠진 천재 프로듀서가 만나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 성공을 이끌어내는, 어찌보면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재미 있습니다. 기대하는 대로 딱딱 흘러가고, 전형적인 ‘나쁜 사람이 아닌 악역’과 좋은 사람들만 줄줄이 등장하며, 관객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장면이 속시원하게 딱딱 터져주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헤어질 것 같은 장면에서 정말 헤어지고, 주인공인 프로듀서는 역시 천재였고, 떠난 남자친구는 주인공의 재능에 사랑을 깨닿고 돌아오며, 주인공은 위대한(또는 그렇게 들리는) 음악을 척척 만들어내고, 그 음악에 악역은 감동하여 무릎 꿇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음악입니다. 주인공 그레타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는 꽤 노래를 잘 부르고, Maroon 5의 프론트맨인 Adam Levine이 비중 큰 조연으로 등장해 직접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Adam Levine이 분한 데이브가 콘서트에서 그레타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Adam Levine은 역시나 노래를 너무나 잘 부르고 ‘성공한, 못된, 하지만 나에게 돌아오고 싶어하는’ 남자가 ‘나에게 돌아오고 싶어 울며 비는’ 장면에 대한 몰입으로 한층 더 감동적인 장면이 됩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꽤 많은 노래를 부르고, 부르는 노래들은 꽤 그럴듯 해 들립니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장점은 ‘뉴욕’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가 세션들을 이끌고 곡을 녹음하는 곳은 뉴욕의 골목길, 센트럴 파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건물 옥상 등이며, 이 장면들은 잘 찍힌 장면과 잘 녹음된 음악으로 ‘음악의 도시 뉴욕’의 거리와 잘 어울려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감독은 그레타의 친구 스티브의 입을 빌려 ‘음악의 도시 뉴욕’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공신은 아무래도 마크 러팔로이며, 키이라 나이틀리의 연기도 나쁘지 않고(턱 내미는 연기는 고칠 수 없나봐요), 영화에 처음 출연한 아담 리바인의 연기도 좋습니다.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바 있는 캐서린 키너와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마크 러팔로가 분한 댄의 가족들로 분해 좋은 연기를 보여주며, 그외 세션을 연기한 조연들과 지나가는 단역들의 연기도 딱히 흠잡을 데는 없습니다.

평론가들은 감독 존 카니에게 소포모어 징크스니 뭐니 하는 말들을 할 것 같습니다. 첫 영화 Once는 ‘유니크’하고 ‘뷰티풀’하며 ‘프로그레시브’한 영화였지만 이번 영화는 진부하다는 평이 벌써 나왔지요. 하지만 존 카니는 사람이 노래하는 장면을 잘 찍습니다. 그리고 스토리에 잘 담아냅니다. 그리고 영화는 충분히 재미 있습니다.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은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음악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은 존 카니가 가장 잘하는 것일 것입니다.  잘 하는 것을 굳이 안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족)
여 주인공 이 작사 작곡하여 남자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곡 Lost Stars의 가사,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이 말은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이라는데, 극장 자막은 “젊음은 왜 젊은이들에게 낭비되나요?”정도로 같이 표시 되었던 것 같습니다.
뭐 굳이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미를 생각하자면 “신이시여, 왜 젊음을 젊은이들에게 주셔서 이를 낭비하게 하시나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그의 묘비에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우물쭈물하다가 이꼴 날 줄 알았어.” 라고 써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Lost Stars의 가사 일부인 저 말이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하지만, 성향으로 비추어 볼 때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